〃정보공유해요〃

[스크랩] 골굴사에서 기림사로..

하얀앙녀 2006. 12. 27. 11:32
골굴사에서 기림사로

이미 예상했듯이 골굴사에서 나와 기림사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도 버스가 없었을 뿐더러 생각보다 많은 차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원래 히치하이킹은 차가 많을수록 힘든 법이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해줄 거라는 바로 그 현대사회의 익명성이 사람들의 관용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교통의 존재와 무관하게 도시에서 히치하이킹이 힘든 까닭이기도 하다.

▲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
ⓒ 이희동
끊임없는 구애와 계속되는 거부. 20여분 정도 손을 흔들고 나서야 난 히치하이킹에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번의 은인은 열 살 안팎의 아들을 하나씩 데리고 기림사로 향하던 두 분의 여성. 이미 4명으로 만차였던 승용차였건만 그분들은 기꺼이 날 태워주셨고, 덕분에 나는 별 고생 없이 기림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무척 고마울 수밖에.

일주문을 지나 기림사까지 가는 길. 이곳에 오기 바로 전, 최근에 조성된 골굴사를 봤던 까닭인지 기림사까지 나 있는 그 고전적인 사찰의 길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찰이라더니 그 명성 그대로 옛 길이 보존되고 있는 것인가.

항상 그렇듯이 모든 사찰까지 들어가는 그 길은 영감을 낳기 마련이다. 비록 암자를 오를 때만큼 치열하지는 않더라도 사찰까지 들어가는 그 길은 고뇌의 여정을 축소시켜 놓은 듯, 우리로 하여금 한번쯤 뒤를 돌아보게 한다.

전쟁의 흔적

이윽고 도착한 기림사 경내. 우선 눈에 띄는 건 경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진남루였다. 이름을 보아하니 그 뒤에 본전이 있을진대 건물은 정작 이름 속의 '루'와는 달리 단층의 기다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남루 역시 선운사의 만세루 마냥 루로서의 모습은 사라지고 단지 이름만이 남아 관념상 루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정작 나의 눈길이 닿는 건 그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진남루'라는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국내 사찰을 돌아다녔건만 '진남'이라는 이름은 처음이었다. 달마는 동쪽으로 간다고 했건만 남쪽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곳으로 나간다는 것일까? 극락의 방향은 남쪽인가? 서방정토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 늠름히 서 있는 기림사의 진남루.
ⓒ 이희동
수수께끼는 금방 풀렸다. 진남루 옆의 표지판에는 그 이름의 유래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림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병이 기거했던 경주 지방의 전략 요충지였으며 진남루는 그 지휘본부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남방, 즉 왜를 진압한다’라는 의미로서 그와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전을 이야기해도 부족한 불교에서 '진남루'라는 이름을 간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 자체지만 어쨌든 전쟁은 깊은 산사에 그렇게 흔적을 남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기림사의 5가지 샘물(마시면 눈이 밝아진다는 명안수, 마시면 천하무적의 장군이 된다는 삼층석탑 밑의 장군수, 마실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대중들이 마시면 정진하고 서로 화합한다는 화정수, 차를 끓이면 최고의 차가 된다는 북암의 감로수, 물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동쪽 산마루의 오탁수) 역시 그 전쟁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사찰에 가면 어디에나 있는 샘물 이름이 굳이 지금까지 특별하게 전해져 오는 것은 전쟁 때 함월산으로 도망쳐 왔던 사람들이 그 식수를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흔적이 아닐까?

임진왜란 당시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 '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이 기림사로 옮겨져 그나마 보존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기림사는 주요 피난지였다.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기림사는 동해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서 약간 벗어난 산지에 있으며 그 입구가 매우 좁아 쉽게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많은 이들의 피난처인 동시에 경주로 진격하는 적군의 배후에서 비수를 노리는 전략요충지가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기림사는 그 지역 사찰 중 거의 유일하게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전란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다. 비록 그 흔적은 오랜 세월에 바래졌지만, 관념으로 남아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본래 전쟁은 죽은 이에게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욱 확연하게 각인되지 않았던가.

기림사 경내에서

진남루를 옆으로 돌아 기림사의 본전 대적광전을 만난다. 처음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이후 8차례나 다시 지어져 1600년대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대적광전은 넓고 긴 모습이 불교의 전각이라기보다는 유교풍의 건물이었다.

단청은 퇴색되어 더욱 고색창연했으며, 카메라의 작은 렌즈로 한 번에 담을 수 없었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대적광전 그 큰 현판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본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이 주지하는 열반의 세계를 나타내려면 이 정도의 스케일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 기림사의 본전 대적광전과 조금은 생뚱맞은 삼층석탑.
ⓒ 이희동

▲ 저 계단을 오르면 최근 지어진 기림사의 또다른 모습이 연출됩니다.
ⓒ 이희동
대적광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석탑의 시대별 형식은 잘 모르지만 검푸른 이끼와 군데군데 깨어진 모습에서부터 신라시대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던 그 탑. 그러나 삼층석탑은 그 앞의 대적광전과 조금은 생뚱맞은 모습으로 오묘한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어중간한 위치며 어울리지 않은 색감. 아마도 그 긴장감은 기림사의 오래된 역사의 또 하나의 징표일 것이다. 몇 번에 걸쳐 중창되었을 전각들과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의 조화.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

대적광전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곳에는 지금까지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경내 풍경이 펼쳐졌다. 대적광전이 아무리 크고 우람해도 아늑하고 소담했던 방금 전 공간과는 달리, 그곳은 건물도, 마당도 마냥 크고 마냥 넓기만 할 뿐이었다. 현대에 지어진 공간임에 분명했다. 광복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의 가장 큰 사찰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기림사였다더니 지나간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인가? 중창된 불국사와 불편한 교통은 결국 기림사의 새로운 모습을 잉태한 꼴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공간을 뒤로 절을 나섰다. 아직 경내 박물관도 들르지 않은 채였지만 그 현대의 공간을 본 순간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저 반짝반짝거리는 건물들이 퇴색할 무렵에나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원효 전설의 산실, 오어사

▲ 사찰건축의 축약본 오어사. 금세 대웅전을 마주합니다.
ⓒ 이희동
기림사를 나와 오어사 행 교통수단을 찾는다. 버스도 안 다닌다는 그 곳. 별 수 있는가. 또 다시 히치하이킹 할 수밖에. 요번에는 부산에서 오셨다는 4명의 아주머니들이 나를 태우셨다.

기림사를 나와 오어사를 가려는데 방금 전 내가 오어사 가는 길을 물어 보았던 안내원 아저씨가 나를 태우라고 권유하셨단다. 함께 사찰을 가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자비심 아니겠는가.

기림사에서 오어사 가는 길. 지도만 보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 길은 매우 큰 산을 넘어야 하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곳은 분명 경주시와 포항시의 경계가 될 만했으며, 오어사는 그 산을 넘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길 옆으로 펼쳐진 오어지의 그 아름다운 절경. 사찰은 비록 작았지만 그 곳까지 들어가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덕분에 사찰은 그 규모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 오어사 들어가는 길목의 오어지. 지금쯤이면 단풍으로 한창 이쁠 듯 싶습니다.
ⓒ 이희동
조선 영조 때 재건했다는 오어사는 그야말로 사찰건축의 축약본 그 자체였다. 그 터가 워낙에 좁았기에 웬만한 형식은 생략되어 있었고 가장 중요한 전각들만 세워져 있었다. 때문에 절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대웅전이었으며, 그 동선이 짧은 만큼 사유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아마도 오어지를 옆으로 들어오는 길 자체가 기나긴 대웅전까지의 여정을 대신했으리라.

▲ 원효대사의 삿갓.
ⓒ 이희동
또한 오어사는 원효와 관련된 전설의 산실이었다.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누가 물고기를 살려낼 수 있는가 내기를 하다가 '내 물고기'를 외치면서 유래되었다는 '오어사(吾漁寺)'.

그 이름부터 시작해서, 경내에는 원효가 썼다는 수저와 삿갓이 보존되어 있었고 그것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이 되어 이 작은 사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권위에 기댄 전설의 존재는 깊은 산 구석에 자리한 오어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오어사의 아름다움은 본전 그 자체보다도 주위에 자리한 암자들에 있었다. 결국 좁은 사찰은 아쉬움을 낳았고 그 버리지 못한 미련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 사찰에서 나와 암자를 오르게 하였는데, 오어사의 두 암자, 원효암·자장암은 그런 사람들의 아쉬움을 풀어줄 만한 절경을 지니고 있었다.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은 원효암은 그곳까지 걸어 들어가면서 볼 수 있는 원림의 풍경이 압권이었으며, 오어사 바로 뒤 절벽 위에 자리한 자장암은 그 내려다보는 풍경이 천하일품이었다.

▲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서 있는 자장암.
ⓒ 이희동
그 이름이 상징하는 만큼 각기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두 개의 암자. 역시나 사찰을 들를 때는 가끔 그곳의 부속암자를 순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여행의 방법이다.

오어사에서 나와 포항으로 가는 길. 들어오기를 히치하이킹으로 들어왔으니 나가는 버스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결자해지하는 마음으로 또다시 지나가는 차를 잡는 수밖에.

요번에는 대구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오어사에서 포항까지 그 긴 거리를 마다않고 기꺼이 태워주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요즘도 히치하이킹 하기 쉽냐며 강릉서부터 포항까지 히치하이킹만으로 여행했다는 자신의 7~8년 전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며 항상 히치하이킹 하는 사람들을 태워준다는 그분. 많은 이들이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거창하게 떠들지만 결국 진보라는 것은 일상에서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실천되는 것이다. 자신이 받았던 배려를 잊지 않고 그만큼 사회에 환원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사회는 따뜻해지지 않을까?

▲ 자장암에서 바라본 포항 운제산. 역시 암자에서의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출처 : 아름다운 세상
글쓴이 : 풀잎이슬 원글보기
메모 :